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대 독일연방공화국 총선 (문단 편집) == 제9대 총선 == |||||| 1980년 10월 5일 (총원: 519석, 과반의석: 260석) ||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fff __'''사회민주당'''__}}}]] ||<#fbee31> [[자유민주당(독일)|{{{#00519e __'''자유민주당'''__}}}]] ||<#000000> [[기독교민주연합|{{{#ffffff 기독교민주/}}}]][[기독교사회연합|{{{#ffffff 사회연합}}}]] || || '''228석''' || 54석 || 237석(185석+52석) || 슈미트는 3선에 도전했고 기민당 측에서는 [[바이에른]]의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총리 지명자로 등장했다. 슈트라우스는 '''기사당''' 출신이었는데, 기민당이 아니라 기사당 출신이 총리 후보로 나선 것은 이 때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62년 슈피겔 지가 국방부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자, 슈피겔 편집인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던 전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열렬한 표밭이던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신사적이고 온건했던 슈미트의 행동거지와 달리 슈트라우스는 거친 막말로 정적들을 공격하곤 했다.] 결국 기민당은 4년전에 비해 무려 26석을 잃는 대참패를 당하며 이번에도 [[데꿀멍]]해야 했다.[* 결국 1980년의 총선 이후 슈트라우스는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기민당의 헤게모니는 [[헬무트 콜]]에 의해 확실히 장악된다.] 하지만 이렇게 수립된 슈미트 내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982년 슈미트 내각은 부자 증세를 놓고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과 충돌을 빚는다. 그리고 이 틈을 기민당이 놓치지 않았다. 기민당은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1982년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슈미트 내각은 붕괴한다. 슈미트 내각의 후임으로 의회에서 선출된 사람은 바로 기민당의 당수 [[헬무트 콜]]. 그렇게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1979년 창당한 [[동맹 90/녹색당|녹색당]]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해서 1.5%를 득표했다.[* 당시 기타 정당의 합계 득표율이 2%를 넘지 않았으니, 기타 정당 득표 대부분이 녹색당에게 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